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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의거 59주년] ①마산에서 피어난 민주화 불꽃

기사승인 2019.03.13  14:3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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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시민들 투철한 시대정신과 사명감으로 자유‧민주‧정의 외쳐

1950년대의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은 후 피폐할 대로 피폐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80달러 정도였으며, 서민들의 생존 유지는 미국의 구호물자에 의존하고 있었다.

소득불평등과 경기침체, 부정부패가 만연해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쌓여갔다. 하지만 당시 집권 중이었던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들의 삶을 외면한 채 사사오입 개헌과 보안법 파동 등의 방법으로 12년 장기집권을 넘어 4선의 야욕을 내비쳤다.

부정선거 : 당시 시민들은 3인조, 5인조를 이루어 단체로 투표장에 입장해야 했다. (사)3.15의거기념사업회 제공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도 불법과 부정으로 얼룩졌다. 투표소로 가는 길목에는 자유당 당원과 녹색 제복을 입은 반공 청년단원이 진을 치고 있었고, 사람들은 서로의 감시 아래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투표를 해야 했다.

이마저도 번호표가 나오지 않아 투표를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들은 남성동 민주당 마산시당부 앞에서 “도둑맞은 내 표를 찾아달라”며 호소했다.

또 민주당의 투표참관인 다수가 참관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마산의 경우 시내 47개 투표소 가운데 세 군데만 참관인이 입장할 수 있었다.

그중 한 곳이었던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는 민주당 참관인이었던 안맹선이 부정을 참다못해 투표함 하나를 넘어뜨렸고, 이때 함 안에서 사전투표용지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3.15의거 발상지 : 오동동 통술골목 내에 있는 3.15의거 발상지

마산시 총유권자의 20%에 달하는 1만3천여 명에게 번호표를 주지 않고 사전 투표를 감행한 것이 드러난 것이다.

이에 민주당 마산시당은 오전 10시 30분경 전국 최초로 독자적인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준비했다.

오후 3시 30분경 당원들과 1천여 명의 시민‧학생들이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며 남성동파출소-부림시장-오동동-수성동-어업조합-불종거리로 행진했다.

오후 6시경에는 개표 진행 예정이었던 마산시청 앞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다시 전개돼 마산‧창원 전역으로 확대됐다.

2차 의거 : ‘피로서 찾은 자유 총칼로서 뺏을소냐’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학생들. (사)3.15의거기념사업회 제공

1차 의거가 발생한 지 27일 만이었던 4월 11일, 1차 의거 후 행방불명됐던 마산상고 1학년생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에 떠올랐다.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였다. 시민들은 분개했고, 시신이 안치된 도립병원으로 모여들어 2차 의거를 전개했다. 300여 명의 중고생이 앞장선 이날 시위는 삽시간에 2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기억과 경험을 이어 받은 마산 시민들과 학생들은 당시 사회운동의 주체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투철한 시대정신과 사명감으로 자유‧민주‧정의를 외쳤다. 결국 마산에서 일어난 1‧2차에 걸친 의거는 전국 각지의 청년, 학생, 시민들의 크고 작은 시위를 촉발시켰고, 4.19혁명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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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민성 기자 hcs@kndaily.co.kr

<저작권자 © 경남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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